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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만 리뷰[방구석 추천]/Books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2002.07, 백기완 저)

by 용가리 통뼈 80 2023. 5. 24.

P. 11 아버지는 여기서 남녀간의 갈등이란, 기본적으로 계급적 갈등의 양상으로 번진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사내녀석은 늘상 여자의 윗길에서 지배권을 세우려고 하는데 만약 여자쪽에서 그것을 차리지 못하고 하면, 여자는 영락없이 패하고 만 것이 지금까지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P. 17 요즈음 젊은 여자들에게 여인 삼계가 있어야 한다는 소리가 들리는데 혹시 너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 여자란, 첫째 아름다워야 하고, 둘째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셋째 참을 줄을 알아야 하고 이를테면 사내녀석들이 하는 소리다. 아버지는 이 삼계라는 것에 대하여 모두 정면에서 부정한다. 이는 삼계가 아니라 삼중의 올가미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여자들의 손목에다 수갑을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오라를 묶고 또 그것도 모자라 목에 칼을 씌우는 삼중의 올가미라는 말이다. 

도대체 여자다워야 한다는 게 무엇일까. 여성 노동자들이 품삯 싸움이 벌어져 농성을 하는데 회사측의 조종을 받은 사내 깡패놈들이 쇠뭉치를 들고 들어와, 마구 패고 머리채를 끌고 가면서 하는 수작이다. “야 이년들아, 계집애들이 계집애다워야지.” 이때 계집애다워야 한다는 소리는 무엇일까. 여자들이란 품삯 올려달라는 소리 같은 건 아예 하지도 말고, 회사측에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또 주면 주는대로 받아 먹으며 고분고분 일이나 할 것이지 무슨 개수작이냐 하는 것이다. 여자들이란 원래 사내녀석들의 노예요, 돈있고 권력있는 자들의 노리개인지라 그렇게 노예다워야만 여자라는 수작이 아닌가. 그래서 아버지는 그 누구의 입에서 나오더라도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소리 따위는 아예 애초부터 인정하질 않는다. 그러면, 아버지는 여자도 남자다워야 한다는 말일까. 아니다. 여자는 여자이니 남자를 닮으려고 들 필요도 없고, 또 굳이 여자다워질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무엇일까. 제삼의 인격체가 되라는 말일까. 천만에 여자도 사람이니 그저 사람다워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을 이르는 데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P. 55 그래서,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이다. 담아, 나를 이렇게 팬 놈들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지를 알아봐다오. 만약 그 짐승보다도 못한 것들이 그래도 여인이 있고 아내가 있거들랑, 그 여인들을 만나서 그들이 진정 자기 사내들이 이같은 사람패는 일을 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고, 만약 그런 사실을 알고도 그런 못된 사내들의 짝이 되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여인으로서의 자기 아내 아니 여인의 사랑을 포기하고 스스로 짓밟는 만행이라 이르거라. 그들 여인네들을 다시 여인으로서 살려내는 일을 너희들이 해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만약 너희들 힘으로 모자라면 온 세계의 여성한테 호소해야 한다. 

P. 64 “ 아무개 첨지네, 며느리가 복수러워서” 하며 재산이 불어나는 집안내력을 며느리에게 두고 있는 말 따위는 이같이 한 아리따운 여자를 재산에 결부시켜 그의 여자됨을 빼앗고, 그의 출중한 지혜로 머슴놈들의 정당한 분노를 무디게 하는 데 써먹자는 의도에서 형상화된 것이다. 그러니 이런 부자집 맏며느리상이란 참다운 민중의 삶을 아름답게, 또는 풍요롭게 꾸미는 여성상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P. 70 오늘날 사회의 기본적인 갈등인 사회적, 또는 경제적 불균등은 너희들처럼 약한 여인들의 희생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것이 그 다음의 위기라고 생각된다. 지금 이땅의 모든 뒷골목과 직장, 가정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을 사회적 또는 경제적 불균등의 도구로서 이용하고 있다. 이런 광경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P. 72 담아, 내 딸 삼형제부터 나서거라! 시애비의 재산이나 늘려줄 맏며느리의 우상부터 때려 부숴라. 일하는 일꾼의 알통의 미학이 아니라, 돈의 조화물인 고른 영양 상태의 퇴폐적 아름다움 따위엔 관상볼 것 없이 먹칠을 해버려라! 춘향이의 일편단심은 훌륭하다. 그러나 사람(남성)을 창조할 줄 모르는 낡은 춘향이는 거부되어야 한다. 심청이의 효성도 나쁘지는 않다. 그 끝간 데까지 간 효성에서 한없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온몸으로 바친 희생의 대가를 올바로 구현하지 못한 낡은 심청이는, 오히려 여성의 전진을 가로막는 악덕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개인적 순결보다 사회의 썩은 물결을 가를 수 있는 혁명적 순결이 더욱 요구되는 때다. 

P. 77 시는 말과 글로써 표현된 단순한 특정인의 자의식적 푸념이거나 꿈의 세계가 아니다. 인간의 희비애락이 빚어지는 사회적인 연관관계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몸부림이다. 

P. 97 장수매는 사냥을 떠나기 전날 밤, 그의 사나운 주둥이로 그놈이 자리했던 둥지와 생활주변을 밤새도록 딱딱 하고 송두리째 까팽개친다는 것이었다. 왜 그 짓이었을까. 네 증조할머니가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이러했다. 장수매가 한번 사냥에 나선다는 것은, 그야말로 생명을 건 혼신의 싸움터에 나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온 정성을 싸움에만 두어야지 그까짓 집터에 집착을 두면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백전백승을 확신하되, 설혹 한번 지는 날이면 매의 서식처가 적에게 발각될지도 모를 일이요 그렇게 되면 어느 때든지 장산곶 매의 최후보루가 위태로워질 것이 두려워 자기 둥지를 남김 없이 부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리질은 큰적과 싸우는 마지막 입질 연습이요, 그 부리질을 통해서 자기의 정신적 상황을 점검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만약 여의치 않으면 장수매는 갑자기 부리질을 거두어버리고 사냥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놀라는 것은 매가 아니라 그곳 장산곶 사람들이었다.